다섯살배기 딸애가 (내가) 방해를 한다며 엄청나게 화가 났다. 내가 딸애에게 텔레비전을 끄고 옷을 좀 입으라고 가볍게 제안해서 자기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딸애의 천둥치는 듯한 눈썹, 오그라드는 눈,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고통을 담은(serpent's tooth) 배은망덕한 말을 찾으며 셰익스피어식의 불만을 머금은 입 위로 검은 폭풍운이 드리우는 걸 볼 수가 있다. "엄만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냐!"
여기에 대고 나는, 맥베스 부인의 단검처럼 신속하게, "얘야, 난 처음부터 네 친구였던 적 없단다. 친구란 네 양말을 빨아주지도 않고 따뜻한 겨울코트를 사 주지도 않으며 네 머리 속에서 썩지 않도록 이를 닦으라고 하지도 않는단다"라고 응대한다.
"이제, 옷을 입어라, 아니면 학교에 전화해서 경찰을 보내 네 실배니아 인형 모두 체포해서 추방시키라고 할 거니까."
거친 사랑,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다, 어쨌거나. 그리고, 잘난 체하는 걸로 비춰지려는 바람은 없이(그저 행복한 부산물일 뿐이다), 내 사랑은 구식이다. 모든 장소 가운데에서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유행으로 곧 되돌아올 영국 브랜드의 자녀 양육법이다.
그렇다, 한때 계몽적이고, 아이 중심인 그들의 양육 방식을 뽐내던 바로 그 국가들이,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든, 언제 원하든 놔둔다는 지혜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팔리는 한 스웨덴 아카데믹은 자유방임형 양육 방식이 사회적 공감과 개인적 회복력이 부족하고, 응석받이 유년기를 보낸 이후 인생에서 심하게 실망할 운명에 처해 있는 오만한 어린 성인 세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에게 '안돼'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를 때리는 것과는 같지 않다. 부모는 절친한 친구가 아니라, 부모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심리학자이자 6명 아이의 아버지로 '아이들은 어떻게 권력을 쥐었나'(How Children Took Power)의 저자 데이빗 에버하드(David Eberhard)는 설명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바르게 행동하는지 가르침으로써 성인의 삶에 대비토록 해야 하며, 왕자나 공주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 스웨덴에서는, 아이에 대해 어떤 종류의 간섭이라도 일종의 학대라고 생각한다.
"소위 전문가들은 부모가 (아이를) 벌하기보다는 협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양육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들이 생각하듯 약하지 않다."
에버하드(47)는 10대들의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것과 자살 시도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증가하는 것을 아이들을 보스처럼 대하는 방식이 실패했다는 증거로 들며 학교에서 훈육의 붕괴를 지적한다.
스웨덴은 1979년 체형 금지를 지구상에서 처음 도입한 나라였다. 그 이후, 이러한 시각은 아이들을 어른처럼 대하는 걸 옹호하며 가족 내 위계질서를 내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평등주의 가치가 경제에는 먹힐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가정 전선에서는 재앙이 됐다.
"스웨덴 사회의 특징 가운데 나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어른의 권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점"이라고 켄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자 편집증적 양육(Paranoid Parenting)의 저자 프랭크 푸레디(Frank Furedi) 교수는 말한다. "이것은 아이들을 벌하는 것을 낙인 찍는 것으로 시작했고, 부모가 당연히 해야 하는 아이들 훈육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변질이 됐다. 우려해야 할 부분은 유년기에 무슨 일이 생길지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랐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이다."
외부 세계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인들이 자유방임형 양육을 국민 오락거리 수준으로 올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의 어린이들이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고, 육체적으로는 위대한 자연을 탐사하도록 격려받고, 겨울 스포츠에서 스스로 한계까지 던진다는 점에서, 이들이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존경할 만한 것이 많았다.
아이들은 6세 혹은 7세가 될 때까지 공교육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교육이론가들이 우리(영국) 교육체계보다 선호할 만한 것으로 종종 인용이 되는 것으로, 영국에선 모든 어린이가 5세 생일 즈음에는 전면적인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지난 9월 데일리 텔레그라프(The Daily Telegraph)에 보낸 편지에서, 런던정경대 웰빙 프로그램의 회장 로드 라야드(Lord Layard)와 캠브리지대 심리학과 조교수 데이빗 화이트브레드(David Whitebread)를 포함한 일단의 영국 선두 교육이론가들은 스칸디나비아 모델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세계 국가 90%가 사회 및 감성 교육을 우선시하고 정식 교육을 6세 또는 7세 때 시작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조기에 시작하면 좋은 결과가 늦게야 나타난다는 잘못된 믿음을 견지하려고 무섭게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고 세이브 칠드런 운동 캠페인 창립자로 해당 편지를 보낸 웬디 엘리앗(Ellyatt)은 말했다. "높은 학력 기준과 성적 책임(accountability)을 모색하는 것에는 아무 잘못된 것이 없지만, 이것이 자연적인 발달을 희생해서 얻는 것이라면 진정 매우 잘못된 것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아주 멋지게 치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서는 무언가 썩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버하드는 스웨덴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교사의 지시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학교에서, 후일에는 그가 보기에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unfulfilled) 어린 성인기로 보는 시기에 사회적 문제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국제적인 교육 비교 결과 스웨덴 학생들이 성취하는 것과 본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이에 큰 불일치가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그는 "그들의 기대치는 너무나 높고 삶은 그들에겐 너무 힘들다. 우리는 이것을 극적으로 증가한 불안 장애 및 자해를 보고 알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진짜로 놀랐을까? 어느 (비스웨덴인) 부모라도 얘기해 주겠지만, 이성적인 협상은 동료 성인들하고야 모든 것이 잘 되겠지만, 극단으로 꼬이고, 지쳐버린 꼬맹이들과는 무용지물이다. 유사하게, 10대 미만 아이들에게 잠자리에 들 시간을 스스로 정하게 하는 것은 불공정하며, 그들이 일단 10대가 됐을 때 책임을 질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무책임한 일이다.
나는 중학교 및 이후의 위험요소를 극복하면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아이들과의 소통 채널을 열어두기 위한 방법이라고 믿는 내 나름대로 자유방임형 부모를 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엄격(하다고 할 만)한 규칙을 엄하게 강요하고 명쾌하게 기대치를 제시하는 여타의 부모들보다 사안들에 대해 더욱 정통하다는 점을 알는지는 말할 수 없다. 사실, 그들이 아는 건 덜하고 술만 더 마신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나는 한계를 정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강제할까? 아이들은 무엇을 밀어 붙일까?
'한계'라는 바로 그 단어는 내게 야생 처빌(cow parsley)과 동자꽃(ragged robin) 그리고 배추흰나비 한 마리 또는 두 마리가 무성한 산울타리(hedgegrow)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한계가 폐지된 스칸디나비아에서는, 헐벗은 평지가 노르딕식 느와르 범죄 현장처럼 암담하다.
"스웨덴의 젊은이들은 삶에서 매우 실망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20대에 그렇다"는 것이 에버하드의 관찰결과이다. "자살률은 감소하고 있는데 비해, 자살시도는 크게 증가했으며, 특별히 15세에서 25세 사이 여자애들이 그렇다."
도움에 대한 요구는 무시하기가 불가능할 수준이다. 스웨덴 사회가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로 결정할지 안 할지는 또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극단의 자유방임형 양육과 동등하고 반대편 극단의 훈육형 양육 간에 싸움을 붙이는 것은 잘못일 거다.
대부분의 멀쩡한 정신의 부모들은 아이들 양육은 하나의 기술이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중도에 맞춰 뒤죽박죽으로 활용한다. 나도 항상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바로 인정하겠다. 대부분이마 제대로 하는지도 확실치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노력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내가 딸의 친구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난 내가 훨씬 더 인내심이 있는 무언가이기를 바란다. 확고부동과 공정함은 재미와는 호환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메리 포핀스, 미세스 다웃파이어 그리고 내니 맥피에게나 물어보라.
우리 모두는 양육이란 것이 좋을 때와 나쁠 때 그리고 기대하지 못한 난관(soakings), 허둥지둥함, 요동침과 우회로 등으로 가득한 극단의 롤러코스터라는 점 또한 인지하고 있다. 다만 우리 집에서는, 내가 즐거움을 위한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어른들이란 점을 모두가 알도록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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