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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 간 Leigha O’Kim Basini(한국명 김옥희)씨가 친모를 찾길 기원하며...

뉴스사회
"저를 낳아준 어머니 꼭 찾고 싶어요"1977년 12월 제주에서 태어나 7개월 만에
미국에 입양된 '김옥희 씨의 애절한 사모곡'
어제 제주신문에 친어머니 찾는 편지 보내와




지난해 여름이었습니다, 36년 전 내가 버려진 그곳을 찾은 것이. 어릴 적 생모와 내 뜻과는 상관 없이 헤어진 바로 그곳을요. 1977년 12월 12일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나를 낳은 지 나흘 만에 내 생시(1977년 12월 8일 오전 5시20분)만 쪽지에 남긴 채 떠났지요.

(1978년 7월 생후 7개월 만에 미국으로 입양된 레이아 오킴 바시니씨(Leigha O’Kim Basini. 한국명 김옥희·37·사진)가 15일 해외입양인연대를 통해 본지에 편지를 보내 왔다. 편지에는 자신의 생모를 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 생시만을 단서로 오래된 병원과 제주보육원으로 저를 인계했다는 경찰서도 찾았습니. 어릴 적 사진을 담아 만든 전단지도 붙이고 다녔습니다. 덥고 습한 고향의 날씨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당신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 하나만으로 버텨 냈지요.

당신께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말해 줄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겪었던 일과 당신의 인생을 말이지요. 당신과 함께했던 단 나흘의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으니까요.

당신이 그때 왜 그런 결정을 해야만 했는지 저로선 알기 어렵습니다. 아마 당신 나름의 ‘정’ 때문이었겠지요. 이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럿(Charlotte)이란 도시에서 외동아이로서 내 인생은 축복과 행운의 연속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매우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대학교수인 양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독서, 수영, 미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는 프랑스어와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남편 알렉스를 만나 결혼도 했고요.

근데 왜였을까요? 지난해 나는 ‘내 인생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고향인 한국과 친가족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 나이 서른여섯,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고향땅을 밟아야 했고, 그렇게 하고야 말았죠.

처음은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내 친가족을 찾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건강하고 기쁘게 지내고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김옥희씨의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은 해외입양인연대 02-325-6585로 전화하거나 bfs@goal.or.kr로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

/조문호 기자 jejusinmun@jejupress.co.kr 



by bigfool.in.jeju 2014. 10. 3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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