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eticulous Plan 꼼꼼한 계획
건물 침입은 해버포트(Haverford) 대학 물리학과 교수이자, 1970년대 초반에 평화운동에 있어 백인들의 열렬한 중심이 된 시(市) 필라델피아에서 반전 운동의 고정 활동가였던 윌리엄 C. 데이빗온(Willam C. Davidon)의 생각이었다. 데이빗온 교수는 수년 간의 조직적인 시위가 영향력이 거의 없어 보여 좌절하고 있던 참이었다.
1970년 여름, 리차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한 지 몇 달 뒤, 데이빗온 교수는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헌신과 판단력을 지닌 일련의 활동가들로 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한 명이 빠지기 전 원래 9명이었던 이 그룹은 필라델피아 시내의 FBI 사무소는 보안이 철저해 침입하기 너무 위험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곧 미디어 시의 군 법원 길 건너편 아파트 건물에 있는 FBI 위성 사무소를 목표로 정했다.
이 결정에도 나름의 위험 요소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 위성 사무소에 FBI의 반전 활동가 감시에 대한 서류가 있을지, 또는 침입자가 문을 열자 마자 보안 경고음이 울리지는 않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몇 개월간 매일 밤마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아파트 입주자들의 일상을 외우고 건물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언제 퇴근하는지, 언제 불이 꺼지는지, 언제 잠을 자는지, 아침에 언제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는 레인스 씨(당시 템플 대학교 종교학 교수)는 "우리는 건물 내와 주변에서 야간에 벌어지는 활동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꽤나 확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레인스 부인이 사무소 내에 들어가서야 단원들은 경보 체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건물 침입 수 주 전, 레인스 부인은 FBI에 여성을 위한 일자리가 있는지 조사 중이라며 스워스모어(Swarthmore) 대학교 학생으로 가장해 사무소를 방문했다.
침입 자체는 대략 탈 없이 진행이 됐는데, 예외라면 자물쇠 따개 담당 포사이스 씨가 현관문을 봤을 때 FBI에서 자신이 딸 수 없는 종류의 자물쇠를 채워놓은 것을 발견해 계획과는 다른 출입문을 따고 들어가야 했다는 점 뿐이다. 그는 쇠지렛대를 이용해 손잡이 위의 두 번째 자물쇠인 데드볼트(deadbolt)를 부수었다.
문서들을 서류가방에 넣은 뒤 절도단들은 도주 차량에 모인 뒤 훔친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한 농장에서 재결집했다. 안심스럽게도, 그들은 곧 그 서류더미가 FBI가 정치 집단에 대해 첩보활동을 했다는 강력한 증거임을 발견했다. 스스로 FBI조사시민위원회라고 밝힌 이들은 선별한 문서들을 몇몇 신문사 기자들에게 보냈다. 절도 2주 후에 멧스거 기자가 받은 파일을 기반으로 첫번째로 기사를 썼는데, 닉슨 정부가 워싱턴 포스트 지에게 서류를 반환받으려다 실패한 이후였다.
뉴욕타임스를 포함해 문서를 받은 여타 신문사들이 자체 기사로 뒤를 따랐다.
멧스거의 기사에는 아마도 전체 목록에서 가장 관심을 끌 만한 문서인, 후버 국장이 반대파들을 조사하는데 집착했음을 엿볼 수 있는 1970년의 비망록이 언급됐다. 이 서류는 요원들이 반전 활동가들과 반대파 학생단체를 인터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로써 이런 단체들에 퍼져 있는 과대망상증을 증진하고, 나아가 모든 우편함에 FBI 요원이 배치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 FBI 본부의 메시지였다. 후버 국장 본인이 서명한 또다른 문서에서는 대학 내에서 흑인 학생들에 대한 FBI의 전반적인 감시 활동이 드러났다.
그러나 FBI의 국내 첩보활동에 재갈을 물리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문서는 미지의 단어인 'Cointelpro'가 적혀있는 1968년의 내부 전달 문건이었다.
건물에 침투한 이들도 해당 서류를 받은 기자들도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수년이 지나서 NBC 방송의 칼 스턴(Carl Stern) 기자가 정보공개법에 따라 FBI로부터 Cointelpro - Counterintelligence Program(방첩프로그램) - 의 윤곽을 드러낸 파일을 추가로 획득하고서야 밝혀졌다.
1956년 이후, FBI는 인권 지도자, 정치단체 조직책 그리고 의심이 가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첩보활동을 벌이는 광범위한 작전을 수행해 왔고, 시위 단체간에 불신을 심으려 노력해 왔었다. 공개된 내용 중 으스스한 것은 FBI 요원들이 익명으로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에게, 자살하지 않으면 혼외 정사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낸 것도 있다.
"그건 미국인에 대한 단순 첩보활동이 아니었다"고 프랭크 처치(Frank Church) 상원의원(민주당, 아이다호 주)의 측근인 로흐 K. 존슨(Loch K. Johnson) 조지아대 행정국제관계학 교수는 강조했다. "코인텔프로의 목표는 삶을 파괴하고 명성을 망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 처치 상원의원의 조사 결과 수십 년간에 걸친 FBI의 권력 남용 사례가 더 있음이 드러났고, 이는 FBI와 기타 미국의 정보 기관들에 대해 의회가 더욱 더 감시하도록 이끌었다. 국내 감시에 대한 처치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단도직입적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정부 기관들에게 감시를 받아 왔고, 너무나 많은 정보가 수집됐다".
처치위원회에서 보고서를 배포할 때쯤, 후버 국장은 사망했고 그가 FBI에 세운 제국은 서서히 와해되고 있었다. 그가 '미디어 절도 사건'에 투입한 약 200명의 요원들은 빈손으로 돌아왔고, FBI는 공소시효가 소멸한 지 3일 후인 1976년 3월 11일 사건을 종료했다.
마이클 P. 코탄(Michael P. Kortan) FBI 대변인은 "미디어 절도 사건을 비롯한 당시의 몇몇 사건들은 FBI가 국내 안보 위협을 어떻게 규정하고 보고하는지에 기여를 함으로써, FBI의 정보 정책과 수행에 있어 개혁과 법무성의 수사 지침 작성 등을 이끌어냈다"고 설명했다.
멧스거 전 기자의 책 '절도: J. 에드거 후버의 비밀 FBI의 발견'에 따르면 절도범 중 오직 1명 만이 사건 종료 이전 최종 용의자 명단에 올랐다.
A Retreat Into Silence 침묵 속 은거
8명의 절도범들은 FBI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서로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절대로 단체로 만나지도 않았다.
데이빗온 교수는 지난 해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해당 범죄에 있어 자신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밝힐 계획이었으나, 3명은 익명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나선 사람들 - 포사이스, 레인스 부부와 밥 윌리엄슨(Bob Williamson)이라는 이름의 남자 - 사이에서 그들의 결정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해가 지나면서 레인스 부부의 한때 급진적 정치 성향은 날이 무디었다. 그러나 이들은 스노우든의 NSA 스파이 활동 폭로가 오래 전 그들 자신이 했던 폭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며 그에 대해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들은 사람들 중 일부는 만약 잡혀서 기소될 경우 수년 간 아이들과 격리됐을 수도 있는 일에 참여한 것에 대해 그들을 비판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갈 수 있음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범죄집단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끔찍하리만치 무모한 사람들로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레인스 씨는 "그러나 워싱턴에서 - 상원의원이든 하원의원이든, 대통령조차도 - J. 에드거 후버 국장에 대해 책임을 지우려는 사람은 절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 것임이 매우 분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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